쓰는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닌 의도된 연습의 결과이다:
글쓰기를 인지 과학으로 다시 보다
열네 번째 담론: 내 아이는 원래 글쓰기에 약한 아이가 아니다 —
글쓰기는 못하는 이유가 아니라, 잘 가르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문제를 알았다면, 이제 방법이 필요하다
앞서 13편에서 확인한 것은 하나였습니다. 한국 쓰기 교육은 결과(product)는 끊임없이 요구해 왔지만 과정(process)은 가르친 적이 없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 형식은 알지만 사고가 없는 글이 반복된다는 것.
그렇다면 질문은 자연스럽게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사실 너무나도 당연한 이 질문은 제가 대학생 시절 직접 이러한 글쓰기 교육을 받아보기 전까지 해본 적이 없던 발상이었습니다. 처음 학부생 때 처음 글쓰기 방법을 배우는 수업에서 방법을 배운 후 의도된 연습을 통해 후천적으로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이 생긴 저였기 때문에 대학원에서 가장 더 깊이 파고들고 싶었던 분야가 "쓰기 교육"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쓰기 교육에 가장 구체적으로 답하는 이론이 존 헤이스(John Hayes)와 린다 플라워(Linda Flower)가 제시한 작문 인지 모델(Cognitive Process Model of Writing)입니다.
글쓰기는 세 단계의 인지 과정이다
헤이스와 플라워는 글쓰기를 단순히 생각을 옮겨 적는 행위가 아니라, 세 가지 인지 과정이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활동으로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계획(Planning)입니다. 무엇을 쓸지 목표를 설정하고, 관련 아이디어를 탐색하며, 글의 전체 구조를 조직하는 단계입니다. 내가 이 글에서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어떤 순서로 논증을 전개할지를 미리 생각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번역(Translating)입니다. 계획 단계에서 형성된 생각을 실제 문장으로 변환하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흔히 "글쓰기"라고 인식하는 행위가 이 단계입니다.
세 번째는 검토(Reviewing)입니다. 쓴 글을 다시 읽고 평가하며, 문제점을 발견하고 수정하는 과정입니다. 단순한 맞춤법 교정이 아니라 논리의 흐름이 자연스러운지, 주장과 근거의 연결이 명확한지를 점검하는 인지 작업입니다.
숙련된 필자는 계획과 검토에 상당한 시간을 투자합니다. 반면 미숙련 필자는 계획 없이 곧바로 쓰기 시작하고 쓴 후에도 거의 검토하지 않습니다. 글쓰기 실력의 차이는 문장을 만들어내는 번역 능력이 아니라, 계획과 검토 능력의 차이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 쓰기 교육이 놓치는 두 단계
한국 교육에서 쓰기 훈련이 이루어지는 경우, 대부분 번역 단계에 집중됩니다. 문장을 어떻게 매끄럽게 쓸지, 단락을 어떻게 나눌지와 같은 표현 차원의 훈련입니다.
그런데 계획 단계는 거의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글 앞에서 막히는 것은 표현할 언어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무엇을 써야 할지 생각하는 방법 자체를 배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검토 단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출하고 나면 끝입니다. 수정과 재작성이 학습으로 설계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아이들은 처음 쓴 글이 곧 완성된 글이라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글쓰기의 기초 훈련
계획 단계 훈련은 쓰기 전에 말로 먼저 정리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오늘 이 글에서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뭐야?"라고 물어보세요. 아이가 한 문장으로 대답할 수 있다면 계획 단계가 시작된 것입니다. 대답하지 못한다면 아직 무엇을 쓸지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때는 쓰는 것을 멈추고 먼저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번역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계획 없이 번역부터 시작하는 습관을 끊는 것입니다. 계획이 완성되기 전에 문장을 쓰기 시작하면 결국 떠오르는 대로 쓰기로 돌아갑니다.
검토 단계 훈련은 쓴 글을 하루 뒤에 다시 읽게 하는 것만으로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읽으면 논리가 흐트러진 부분, 주장과 근거의 연결이 약한 부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글쓰기 지도는 결과물 평가가 아니라 과정 동행이다
글쓰기 지도는 완성된 결과물을 평가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계획 단계에서 함께하고, 번역 단계에서 막히는 부분을 함께 풀어가고, 검토 단계에서 다시 읽으며 대화를 나누는 것. 이 과정 전체가 글쓰기 지도입니다.
대치동 현장에서 글쓰기 실력이 눈에 띄게 향상되는 학생들의 공통점은 많이 쓴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쓰고, 검토하는 세 단계를 반복하면서 매번 구체적인 피드백을 받은 경험이 쌓인 학생들입니다.
마무리— 글쓰기를 못하는 아이는 없다, 과정을 배운 적이 없을 뿐이다
글쓰기는 재능의 영역이 아니라 훈련 가능한 인지 과정입니다. 내 아이가 글을 어려워한다면, 계획하고, 쓰고, 검토하는 세 단계 중 어느 단계가 훈련되지 않았는지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그 단계를 함께 걸어가는 것이 진짜 글쓰기 지도의 시작입니다.
📚 다빈치 코드룸 시리즈 3| 글쓰기, 사고력 교육
이 시리즈에 대하여
글쓰기는 오랫동안 타고나는 재능의 영역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인지과학과 언어습득 연구는 다른 결론을 가리킵니다. 글쓰기는 재능이 아니라 인지 과정이며, 그 과정은 이해하고 훈련할 수 있습니다.
이 시리즈는 글쓰기 교육을 전공한 저자가 글쓰기 교육을 둘러싼 여섯 가지 핵심 질문을 다룹니다. 한국 쓰기 교육의 구조적 부재, 글쓰기가 어려운 인지적 이유, 읽기와 쓰기가 다른 회로라는 사실, 말과 글의 차이, IB 교육의 글쓰기 접근법, 그리고 의도적 연습이 쓰기 훈련에 적용되는 방식. 각 편마다 이론적 근거와 현장의 시각을 함께 담아, 학부모가 지금 당장 활용할 수 있는 실질적 방향을 제시합니다.
📋 목차 및 다른 편 바로가기
13편 한국 아이들이 글을 못 쓰는 진짜 이유 — 쓰기 교육이 없었다
14편 내 아이는 원래 글쓰기에 약한 아이가 아니다
15편 책을 많이 읽어도 글을 못 쓰는 아이, 왜 그런가 — 읽기는 재료이고 쓰기는 요리다
16편 말은 청산유수인데 글은 두 줄도 못 쓰는 이유 — 말과 글은 같은 능력이 아니다
17편 IB 교육이 글쓰기를 가르치는 방식이 다른 이유 — 탐구 기반 학습(IBL)
18편 수행평가 글쓰기, 많이 쓴다고 늘지 않는 이유 — 의도적 연습만이 답이다
🏫 다빈치코드룸 소개
다빈치코드룸(DaVinci Code Room)은 대치동 교육 현장의 경험과 교육학 이론을 바탕으로, 초등·중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를 위한 교육 인사이트를 제공합니다.
"전략적으로 배우는 아이가 오래간다"는 믿음 아래, 단순한 학습 정보가 아닌 교육의 원리를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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